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

저는 세상에 끌려가는 사람이 아니라,
세상을 이기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습니다.
세상이 감당하지 못할 사람,
흔들림 없는 정체성과 믿음으로
시대를 거슬러 나아가는 사람이고 싶습니다.

이 시대는 청년들을 나약하게 만듭니다.
편안함에 익숙해지게 하고,
도전 대신 타협을 선택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흐름에 순응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싸워 이길 수 있는 존재이며,
지금은 그 싸움을 위한
담대함을 구해야 할 시간입니다.

군복을 입은 신부가 되고 싶다는 제 고백처럼,
지금 제게 주어진 이 사명을
두려움 없이 감당해내고자 합니다.
그 길 위에서,
저의 삶이 많은 청년에게
도전과 불씨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사도행전 2장 17절 말씀,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이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이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오늘 좀 특별한 경험을 했다.
아직 나는 방언의 해석 은사는 없는데,
기도 중 방언이 터져 나오며
문득 성경 구절의 말씀들 중 단어 몇개가 들려왔고
이게 무슨 뜻인지 몰라서 바로 성경 앱을 켜서
찾아서 주신 말씀들을 하나씩 읽는데
영적인 감각이 더 곤두세워지는 느낌이었다.
여름에 온 몸에 소름이 계속 끊이지 않았다.

"아 주님 지금 나한테 이걸 말씀하시려고."

그 중 하나는 요한복음 14장 말씀이였고
특히 6절 말씀이 기도중 내 입에서 반복 되었다.
'내가 성경 구절로 방언을 하기 시작하는건가?
주님, 무엇을 말하고 싶으신가요?
더 자세히 알려주세요.'

다음 구절은 야고보서 1장 26절,
신앙적인 사람이 자신의 말을 다스리지 못하면
신앙이 헛되다는 말씀이였다.
오늘 아침 우연히 한 동역자 언니가
'다솜아, 함구해.'를 세번이나 해주었어서
'언니가 뭘 함구하라는걸까? 왜 함구하라는걸까?'
의문이 들었는데, 이 말씀이 겹치면서
마음 깊이 찔림이 왔다. 바로 회개했다.
'오늘 하루 나는 내 말을 다스리지 못하지 않았나?'

그리고 사도행전 2장 17절 말씀을 듣게 하셔서
또 세번째의 소름이 돋았는데
'아 하나님이 나에게 영적인 눈을 열어
하나님의 계획을 보여주시겠구나.
그럴려면 나 지금 그 영안을 위해서
계속 쌓는 수 밖에 없겠구나.'

기도는 엉덩이 싸움이라고 했다.
말세를 살아가는 지금,
주님은 영적인 리더들을 세우고 계시고
그들을 통해 시대를 향해 외치고,
새로운 비전과 사명으로
하나님의 계획을 실행하게 하신다.
그것만큼 귀한 게 없지 않을까?

어제 영적인 가이드를 받고 기도를 할 때
영적인 안테나에 더 집중했다.

이번주 설교를 다시 들으면서,
이번주 찬양을 계속 되새기면서,
기도하면서.
'주님 당신의 깊은 임재 안으로 들어가길 원합니다.
그 임재 속에서 환상을 보게 하시고,
담대함을 허락해주세요.'

가진 게 없기 때문에 도전해도 잃을 게 없고,
내가 내 삶을 계획하지 않을 때
주님이 일하시는 공간이 생기고,
인생에서 어떻게 하나님이
나를 다듬어가시는지를 쭉 보면
매일이 놀라운 것 같다.

회사, 집, 교회 이 모든 것들의 공간과 시간 구분 없이
차원을 뛰어넘는 주님의 일하심을
내가 감히 제한할 수 없다.

목사님이 소개시켜주신 대표님의 사이트에서

'복음은 너무도 선명하고,
진리는 단순합니다.
세상에 끌려가는 것이 아닌
세상을 이기는 이 시대 크리스천
청년들의 라이프스타일이 필요합니다'

영적인 눈과 귀가 더 열려
주님의 음성에 내가 함께 호흡할 수 있기를.
그것들이 나를 통해 공동체에 퍼져나가기를.

회사도, 교회도 사역지인 나에게
너무 외로운 싸움이였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은 정도의 주님의 갈급함'
너무 커서 죽을 것 만큼 힘들었다.
고통스러웠다.
'왜 나는 이렇게 민감하게 살아야 하나?'
'왜 세상의 문제들을 그냥 못 지나치고,
자꾸 해결하려고 하나?'

그 영적인 민감함이
오히려 나를 또 살게 하고,
담대하게 만든다.

내가 강하기 때문이 아니라,
내 주님이 강하기 때문이다.